“우린 아직도 세월호에 갇혀 있어…이젠 4월 16일 잊고 싶다”
딸 잃은 아빠 김병권씨 10년의 소회
4월 소리없이 빨리 지나갔으면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 이뤄져야
4월 소리없이 빨리 지나갔으면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 이뤄져야
![]() 16일 오전 치러진 선상 추모식에 참가한 김병권씨가 10년간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
“10년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은 아직도 세월호 선체에 갇혀있습니다.”
단원고 2학년 3반 고(故) 김빛나라양 아버지 병권씨의 울먹임이다.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 초대 위원장인 김씨는 “이제는 4월 16일을 잊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왜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야만 했나’는 이유를 듣지 못해 지금까지 유가족들이 세월호에 아이들과 함께 갇혀있다”고 말했다.
10년전 수학여행길에 나선 딸의 전화 한 통화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그는 수년동안 전국을 누비며 딸의 죽음의 책임자를 밝혀 내고 싶어했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된 그는 2년전 간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데 그게 가능한가? 오늘도 현장에 오면 딸의 마지막 전화통화가 생각나 억장이 무너지는데 또 올 수 밖에 없다”며 “부모라서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당시를 회상하면 그는 분노로 온몸이 떨린다고 말했다. 사고 소식에 한달음에 진도로 달려갔지만 잔잔한 바다가 배를 통째로 삼키고 있었고, 아이들을 구조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해경은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나를 비롯한 부모들이 ‘제발 가서 구해달라고, 아직 애가 저기 있다고’ 악을 쓰고 난리를 쳐도 뭐 하는 게 없었다. 그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매일 팽목항을 지키며 딸을 기다렸고, 4일 후 겨우 뭍으로 나온 딸을 봤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더디게만 진행됐고, 그동안 유가족들끼리도 서로 갈라져 갈등하는 지경까지 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진상규명이 명확히 이뤄지고 책임자가 제대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때서야 유가족들은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면서 “일주일 전에도 유가족 한 분이 돌아가셨다. 더이상 버티지 못한 가족들이 늘어나지 않도록 제발 도와달라”고 토로했다.
“올해 말 4·16생명안전공원이 착공되고 진행 중인 소송이 마무리되는대로 해외로 떠날 것”이라는 그는 “신뢰를 잃어버린 나라에서 사는 것이 매일 고통”이라고 절규했다.
/진도 글·사진=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단원고 2학년 3반 고(故) 김빛나라양 아버지 병권씨의 울먹임이다.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 초대 위원장인 김씨는 “이제는 4월 16일을 잊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왜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야만 했나’는 이유를 듣지 못해 지금까지 유가족들이 세월호에 아이들과 함께 갇혀있다”고 말했다.
결국 건강이 악화된 그는 2년전 간암 판정을 받고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려면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데 그게 가능한가? 오늘도 현장에 오면 딸의 마지막 전화통화가 생각나 억장이 무너지는데 또 올 수 밖에 없다”며 “부모라서 어쩔 수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그는 “해경은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나를 비롯한 부모들이 ‘제발 가서 구해달라고, 아직 애가 저기 있다고’ 악을 쓰고 난리를 쳐도 뭐 하는 게 없었다. 그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매일 팽목항을 지키며 딸을 기다렸고, 4일 후 겨우 뭍으로 나온 딸을 봤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더디게만 진행됐고, 그동안 유가족들끼리도 서로 갈라져 갈등하는 지경까지 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진상규명이 명확히 이뤄지고 책임자가 제대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때서야 유가족들은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면서 “일주일 전에도 유가족 한 분이 돌아가셨다. 더이상 버티지 못한 가족들이 늘어나지 않도록 제발 도와달라”고 토로했다.
“올해 말 4·16생명안전공원이 착공되고 진행 중인 소송이 마무리되는대로 해외로 떠날 것”이라는 그는 “신뢰를 잃어버린 나라에서 사는 것이 매일 고통”이라고 절규했다.
/진도 글·사진=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