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보러 왔어” 애끓는 외침에도…바다는 말이 없었다
르 포-세월호 10주기 선상 추모식
안산서 새벽길 달려온 유족들
맹골수도서 눈물 속의 헌화
10년 지켜왔던 부표도 녹슬어
“제발 꿈에라도 나와줬으면”
여전한 그리움에 오열 토해내
안산서 새벽길 달려온 유족들
맹골수도서 눈물 속의 헌화
10년 지켜왔던 부표도 녹슬어
“제발 꿈에라도 나와줬으면”
여전한 그리움에 오열 토해내
![]()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16일 오전 진도군 맹골수도인근 세월호 참사 해역에서 열린 선상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사고현장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다. |
“제발 아빠 목소리 좀 들어다오. 아빠가 널 보러 왔어.”, “아들, 엄마 꿈에 한 번만 나와주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10년째 진도 맹골수도 바다에서 스러지고 있다. 격한 오열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10주기 세월호 선상추모식이 열린 16일 오전 7시 목포시 죽교동 목포해경전용부두. 안산에서 5시간여 새벽길을 달려 목포를 찾은 유가족들은 다시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1년에 단 하루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지만 검은 옷차림을 한 유족들은 가슴과 허리춤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달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배에 탑승했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10년전 ‘그날’은 오늘, 현재의 아픔이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간다며 나간 아이들이 참사로 선박이 기울어도 ‘걱정말라고’ 전화를 한 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오늘도 도저히 슬픔에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믿고 구조조차 받지 못한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속에 갇힌 것만 생각하면 부모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세월호 유가족 37명을 비롯한 4·16재단, 안산온마음센터 관계자 11명 등 총 86명은 이날 해경 경비함정 3015호(3000t급)에 탑승해 사고해역인 진도 맹골수도로 출항했다.
3시간여 동안 88여km(55마일)을 항해 후 멀리 세월호 사고 해역을 알리는 ‘세월’이라는 두글자가 적힌 노란색 부표가 보이자 부모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덤덤하게 버티던 가족들도 10년을 한자리에서 지키던 부표조차 곳곳에 녹이 슨 모습을 보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 내렸다.
추모식을 알리는 먹먹한 뱃고동 소리가 세 차례 울리자, 유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다시 밀려왔다.
선상에서 250명의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하자, 그리웠던 이름을 들은 부모들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묵념을 마친 이들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훔치며 하나 둘 국화꽃을 바다에 떨어뜨렸다.
단원고 2학년 8반 고(故) 이호진군의 아버지 용기씨는 “우리 아이들이 하늘나라로 이사간지 10년이 되는 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맞이하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깊은 바다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5명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외쳤다.
진도 앞 바다에서 외동딸(단원고 2학년 1반 고(故) 우소영양)을 잃은 우종희씨도 10년전 마지막 딸의 목소리를 회상하며 오열했다.
우씨는 “딸에게서 ‘배가 이상하다. 기울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그렇게 연락이 끊겼고, 그게 마지막 목소리였다”며 10년 전을 회상했다.
부모들은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향해 “아들, 제발 엄마 꿈에 한번만 나와줘. 제발. 너무 보고싶어”라며 애끓는 심정을 토해냈다.
부모들은 10년의 세월동안 같은 아픔을 공유해왔던터라 오열하면서도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기도 했다.
일부 부모는 조화를 바다에 던지면 아이들을 영영 잃게 될까봐 헌화를 주저했다. 결국 한 학부모는 뱃머리가 사고해역을 벗어날 때까지 국화꽃을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유족들은 이후 세월호 선체가 보존돼 있는 목포신항으로 자리를 옮겨 추모문화제에 참석하고 오후 4시가 넘어 다시 안산으로 돌아갔다.
/진도 글·사진=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10년째 진도 맹골수도 바다에서 스러지고 있다. 격한 오열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10주기 세월호 선상추모식이 열린 16일 오전 7시 목포시 죽교동 목포해경전용부두. 안산에서 5시간여 새벽길을 달려 목포를 찾은 유가족들은 다시 차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10년전 ‘그날’은 오늘, 현재의 아픔이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을 간다며 나간 아이들이 참사로 선박이 기울어도 ‘걱정말라고’ 전화를 한 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오늘도 도저히 슬픔에 익숙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 37명을 비롯한 4·16재단, 안산온마음센터 관계자 11명 등 총 86명은 이날 해경 경비함정 3015호(3000t급)에 탑승해 사고해역인 진도 맹골수도로 출항했다.
3시간여 동안 88여km(55마일)을 항해 후 멀리 세월호 사고 해역을 알리는 ‘세월’이라는 두글자가 적힌 노란색 부표가 보이자 부모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덤덤하게 버티던 가족들도 10년을 한자리에서 지키던 부표조차 곳곳에 녹이 슨 모습을 보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 내렸다.
추모식을 알리는 먹먹한 뱃고동 소리가 세 차례 울리자, 유가족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다시 밀려왔다.
선상에서 250명의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하자, 그리웠던 이름을 들은 부모들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묵념을 마친 이들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연신 훔치며 하나 둘 국화꽃을 바다에 떨어뜨렸다.
단원고 2학년 8반 고(故) 이호진군의 아버지 용기씨는 “우리 아이들이 하늘나라로 이사간지 10년이 되는 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을 맞이하니 가슴이 더욱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아직도 깊은 바다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5명의 이름을 함께 부르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외쳤다.
진도 앞 바다에서 외동딸(단원고 2학년 1반 고(故) 우소영양)을 잃은 우종희씨도 10년전 마지막 딸의 목소리를 회상하며 오열했다.
우씨는 “딸에게서 ‘배가 이상하다. 기울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그렇게 연락이 끊겼고, 그게 마지막 목소리였다”며 10년 전을 회상했다.
부모들은 난간을 붙잡고 바다를 향해 “아들, 제발 엄마 꿈에 한번만 나와줘. 제발. 너무 보고싶어”라며 애끓는 심정을 토해냈다.
부모들은 10년의 세월동안 같은 아픔을 공유해왔던터라 오열하면서도 서로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기도 했다.
일부 부모는 조화를 바다에 던지면 아이들을 영영 잃게 될까봐 헌화를 주저했다. 결국 한 학부모는 뱃머리가 사고해역을 벗어날 때까지 국화꽃을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유족들은 이후 세월호 선체가 보존돼 있는 목포신항으로 자리를 옮겨 추모문화제에 참석하고 오후 4시가 넘어 다시 안산으로 돌아갔다.
/진도 글·사진=장혜원 기자 hey1@kwangju.co.kr